논란 전 이미 꺾인 동력… 스타 과잉·시대감각의 간극·서사적 미완의 한계
시작부터 달랐다.
‘서울의 봄’은 11월 비수기,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이미 모두가 아는 비극적 결말이라는 불리함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반전이 시작됐다. 입소문이 입소문을 불렀고, 개봉 2주차 평일 관객은 첫날 스코어를 넘어섰다. 2주차 주말에는 170만2198명을 동원해 첫 주말 149만4232명보다 오히려 더 많은 관객을 불러들였다. CGV 골든에그지수도 99%까지 치솟았다. 관객이 관객을 불러낸 영화는 결국 1300만 고지를 넘겼다.
‘암살자들’은 정반대였다.
‘서울의 봄’을 만든 하이브미디어코프의 신작에 허진호 감독, 유해진·박해일·이민호가 뭉쳤다. 한 작품을 끌고 갈 만한 톱배우들까지 특별출연으로 줄을 섰다. 추석 대목과 제작사의 브랜드값까지 등에 업은 영화는 압도적인 사전 예매량을 기록하며 거침없이 출발했다. 연휴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할 때만 해도 승승장구가 예상됐다.
그러나 연휴가 끝나자 기세는 빠르게 꺾였다. 28일 하루 관객은 6만7406명까지 떨어졌고, 스크린 수가 훨씬 적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타짜: 벨제붑의 노래’에 정상까지 내줬다. 29일 하루 만에 1위를 되찾았지만 관객은 6만1496명으로 오히려 전날보다 더 줄었다. 누적 관객은 169만5104명. 순위는 반등했지만 관객 동력까지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30일 현재 CGV 에그지수 역시 91%다.
무엇이 두 영화의 운명을 갈랐을까.
두 작품 모두 실제 역사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했다. 그런데 관객이 그 상상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랐다.
‘서울의 봄’ 역시 픽션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결론을 비트는 대신 그 안의 인물과 순간을 파고들었다. 특히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은 실제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을 주요 모티브로 삼아 영화적으로 재창조한 인물이다.
그 선택은 12·12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만들어냈다. 권력에 눈먼 군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군복을 입고도 끝까지 명령체계와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 있었다.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었지만 관객은 그 과정에 뜨겁게 반응했다. 영화가 끝난 뒤 실제 인물과 사건을 다시 찾아봤고, 관람 중 치솟는 심박수를 인증하는 ‘심박수 챌린지’까지 유행했다. 이미 확인된 역사의 결론을 바꾸기보다 기록 사이의 빈칸을 상상력으로 채운 셈이다.
‘암살자들’도 실제 역사에서 출발한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당시 발표된 사건의 전말에 의문을 품고 또 다른 배후의 가능성을 추적한다. 다만 ‘서울의 봄’과 달리 이번에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 자체가 미스터리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 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도 시작됐다.
일부 정치권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영화가 사실과 다른 의혹을 제기한다며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했다. 제작진은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의 사실을 부정·왜곡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며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맞섰다. 허진호 감독 역시 결론을 내리기보다 실제 사건을 둘러싼 의문을 질문하는 영화라는 입장을 밝혔다.
창작자의 의도가 작품 해석의 유일한 정답일 수는 없다. 관객이 영화 속 단서들을 연결해 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것 역시 작품 감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화가 특정인을 배후로 명시하지 않았는데 작품이 보여준 것 이상을 확정해 비판하는 것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최근의 흥행 둔화를 ‘역사 왜곡 논란’ 탓으로만 돌리기도 어렵다. 관객 수와 예매 동력이 꺾인 것은 정치권 공방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오히려 논란 이후 예매율은 소폭 상승했다. “대체 어떤 영화길래”라는 호기심이 붙은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그 관심이 실제 관객 증가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1위는 되찾았지만 일일 관객은 전날보다 줄었다. 논란이 관심의 불씨는 되살렸어도 꺾인 흥행 곡선까지 뒤집지는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영화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암살자들’이 중요하게 내세운 또 하나의 가치는 언론인의 신념이다. 진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외압에도 타협하지 않는 기자들의 직업정신은 후반부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정점을 찍는다.
‘서울의 봄’의 이태신 역시 영화적으로 이상화된 군인이다. 하지만 그의 군인정신은 시대가 달라져도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기대하는 원칙과 책임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확장됐다.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판타지가 오히려 현실의 결핍을 건드린 셈이다.
반면 ‘암살자들’의 우직한 언론인상은 오늘의 관객에게 조금 더 많은 설득을 요구한다. 반세기 동안 미디어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고 언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역시 복잡해졌다. ‘진실 하나를 위해 목숨까지 거는 기자’는 여전히 가슴 뛰는 이상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영웅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들의 신념을 지금도 유효한 가치로 본 호평이 있는 반면, 기자 인물에 충분히 감정이입하기 어렵고 작품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왔다. 판타지에도 설득력이 필요한 법이다.
화려한 특별출연 역시 몰입을 흔드는 요소다. 정우성, 박정민, 심은경 등 주연급 배우들이 크고 작은 역할로 줄줄이 등장한다. 유명 배우의 등장은 미스터리에서 “저 배우가 저 역할로 끝날까”라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카드가 반복되자 캐릭터보다 배우의 얼굴이 먼저 보이고, 사건보다 “다음에는 누가 나오나”에 시선을 빼앗긴다. 화려한 성찬도 지나치면 과식이 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장르적 완성도의 아쉬움이 남는다.
시대를 복원한 미장센과 유해진·박해일·이민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에는 분명 힘이 있다. 반면 의혹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시작한 영화가 후반부 시대극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충분히 매끄럽지 않다. 여러 갈래로 질문을 던지지만 이를 하나의 강력한 서사적 쾌감으로 수렴시키지 못한다. 관객에게 판단의 몫을 남기는 열린 태도와 별개로, 장르영화로서 가져가야 할 답과 여운까지 흐릿해진 것은 아쉽다.
결국 영화 밖에서 벌어진 역사 논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호불호다. 하이브미디어코프는 ‘덕혜옹주’부터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하얼빈’, OTT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대중적인 장르 콘텐츠로 만드는 데 남다른 강점을 보여왔다. 실제 역사와 영화적 상상력의 결합은 이 제작사의 확실한 색깔이자 흥행 공식이었다.
그러나 같은 공식이 언제나 같은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봄’은 개봉한 뒤 관객의 손에서 기대보다 더 커진 영화였다. 반면 ‘암살자들’은 개봉 전의 높은 기대를 개봉 후 더 큰 입소문으로 이어가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두 영화의 운명이 갈린 순간은 어쩌면 스크린 안이 아니라 그 다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본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서며 다음 관객에게 무슨 말을 남겼는가.
흥행의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