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은 있었지만, ‘왕실’은 없었다. 신분 판타지의 도파민은 빌려왔지만, 왕실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무게는 감당하지 못했다.
지난 16일 종영한 MBC 금토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극본 유지원, 연출 박준화)은 마지막회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인 13.8%(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첫 방송 7.8%로 시작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고, MBC 금토드라마 역대 3위라는 기록도 남겼지만, 아이유와 변우석의 조합이나 방송 전부터 높았던 화제성, 300억원 규모의 막대한 제작비 등을 고려하면 15%의 벽을 넘지 못한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성적표가 기대만큼 압도적이지 못했던 가운데 뒷맛도 개운치 않다. 역사 왜곡 논란이 ‘동북공정’ 의혹으로까지 번지면서다. 다만 이 논란을 중국 자본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라는 음모론적 시각으로 바라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은 한국 왕실과 궁중 예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채 세계관을 소비한 제작진의 무지와 부주의가 낳은 고증 참사에 가깝다.
이 작품은 극 중 왕실 표현과 궁중 예법, 의상 등을 둘러싸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이안대군(변우석 분)이 즉위할 때 사용된 면류관이 독립국 제왕의 상징이어야 할 12줄이 아닌, 제후국이 사용하는 9줄이었다는 점, 신하들이 ‘만세’대신 ‘천세’라고 외친 점 등을 두고 “대한민국을 속국처럼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해당 논란을 단순 고증 오류를 넘어 동북공정 의혹으로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작진도 고개를 숙였다. 지난 16일 제작진은 “애정을 갖고 드라마를 지켜봐 주신 많은 분께 세계관 설정과 역사적 고증 이슈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아울러 구류면류관과 ‘천세’ 산호에 대해 “조선의 예법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제작진이 세심하게 살피지 못해 발생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1세기 대군부인’은 로맨스물인 동시에 대체 역사물의 성격을 지닌 드라마로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역사적 맥락이 교차하는 부분에 대해 신중하고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했으나, 정교하게 세계관을 다듬고 더욱 면밀하게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문제 장면들이 의도적 역사 왜곡의 결과라기보다 역사적 맥락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데서 비롯됐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동북공정’이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점은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북공정’은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 중국의 역사 편입 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드라마 속 오류를 가지고 작품 전체를 의도적 역사 왜곡이나 중국식 역사관의 반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실제로 드러난 문제들은 조직적인 의도라기보다 제작진이 시인한 대로 ‘세계관 설계의 부실’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오류가 있던 장면들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논란 외에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통적으로 한국 왕실에서 대비는 왕보다도 윗전이다. 대비는 왕이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경우 ‘수렴첨정’을 하고, 왕의 후사가 없이 사망할 경우 다음 왕위 계승에 대한 권한까지 가졌던 막강한 존재다. 그런 대비가 일개 대군에게 석고대죄를 하는 듯한 장면은 한국 왕실의 위계와 예법을 고려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왕의 8촌 이내 친족은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종친불사’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대군이라는 존재가 지닌 정치적 제약과 상징성에 대한 고민도 없이 ‘섭정’으로 나서게 한 대목 역시 왕실 내 위계와 권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본 이해도부터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21세기 대군부인’은 단순히 현대 로맨스가 아니었다. 21세기 입헌군주제 대한민국이라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왕실과 재벌가, 평민과 왕족의 신분 차이를 주요 갈등의 소재로 삼았다.
핵심 세계관이 왕실 제도와 상징에 기대고 있는 만큼 제작진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입헌군주제가 존속하려면 어떤 역사적 전제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는지, 왕실의 위계와 의례는 어땠는지, 사회의 근간이 되는 효와 예는 무엇이었는지 등 최소한의 이해와 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고민 없이 ‘대군’이라는 단어를 판타지 로맨스 장르의 웹소설 속 ‘북부대공’ 같은 캐릭터로 끌어다 썼다. 그 결과 여러 고증 오류와 위계 혼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결국 대군은 있지만 왕실은 없었고, 신분은 있지만 제도는 없고, 궁은 있지만 예법은 없는 당황스러운 세계관이 탄생했다.
창작물에는 허구와 변주가 가능하다지만, 가상 설정이라고 해서 모든 고증 오류가 면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끌어다 쓸 것이었다면, 역사적 감수성은 고려했어야 했다.
이번 논란은 예정된 참사에 가까웠다. 이미 국내 드라마 업계는 역사적 상징과 세계관 설계를 허술하게 다뤘을 때 어떤 역풍이 돌아오는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조선구마사’가 조기 종영으로 퇴장한 뒤 역사 왜곡이나 중국풍 논란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충분히 학습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21세기 대군부인’은 가상 설정과 로맨스라는 이름 아래 ‘입헌군주제’라는설정을 지나치게 안일하게 소비했다. 1차적으로는 세계관을 설계한 작가의 책임이 크다. 어떤 사회적 합의나 역사적 전제도 없이 입헌군주제 존속을 내세우고, 대군부인을 ‘군부인’(공식 호칭은 부부인)이라고 부르는 기본적인 실수까지 했다. 대본에 최소한의 고민도 담겨있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차적으로는 이를 걸러내지 못한 제작 시스템의 책이미다. 대본 빌드업 단계부터 미술, 의상 확인, 촬영, 편집, 방송 전 가편집본 확인 등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지점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의 장면들이 그래도 전파를 탄 점을 미루어보면 이는 단순히 작가 한 사람의 실수라기보다 제작사와 방송사가 검증을 얼마나 안일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로맨스물로 이해해달라’는 말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왕실과 신분의 갈등을 핵심 장치로 사용했다. 장르를 핑계로 세계관의 허술함과 역사적 감수성의 결핍이 면책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착오와 실수들이 모여 ‘동북공정’에 이용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시청자들이 역사 왜곡을 우려하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잘못은 맞다. 다만 잘못한 부분을, 잘못한 만큼만 질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번 사안은 단순 실수로 축소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무지와 부주의가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왜곡과 다르지 않은 장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의도가 없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례는 기본적인 검증의 부재가 얼마나 큰 파장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더 큰 문제도 남았다. 이처럼 검증의 부재가 만든 무거운 책임의 화살이 정작 작품을 설계하고 만들어낸 제작진이 아닌 배우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연인 아이유는 지난 16일 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잘하겠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 타이틀롤로서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발언이었다.
그러나 사과 이후 그에게 쏟아지는 질타는 과도했다. 심지어는 한 번도 직접 밝힌 적 없는 그의 정치적 성향까지 언급하며 죄인으로 매도하는 글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방송 초반 아이유의 연기를 향한 혹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사가 쌓이고 성희주의 결핍과 욕망이 선명해지면서 해당 평가는 점차 잦아드는 분위기였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로맨스와 감정선을 함께 책임진 상대 배우에 대한 표현력에 대한 아쉬움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먼저 고개를 숙인 사람이 아이유였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완성도와 연기에 대한 비판까지 그에게 집중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주연 배우의 책임감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과한 사람에게 모든 화살이 향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정확해야 한다. 잘못은 잘못한 만큼 지적하고, 책임은 책임져야 할 곳에 물어야 한다. 작품의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가 필요하다면, 그 몫은 제작진과 방송사가 먼저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대군부인’을 둘러싼 논란을 가장 냉정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김소연 스타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