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은이 영화 ‘경주기행’으로 또 한번 강렬한 연기를 남겼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경주기행’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 경주를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죽이는 여행’을 떠난 네 모녀의 가족 복수극이다. 데뷔작 ‘갈매기’로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미조 감독의 첫 상업영화로, 배우 이정은을 비롯해 공효진, 박소담, 이연이 호흡을 맞췄다.
이정은이 처음 ‘경주기행’의 시나리오를 접했을 당시에는 세 딸을 누가 연기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감독님에게 어떤 배우가 출연하는지 물어보는 편도 아니다. 시나리오가 좋아서 계속 잡고 있었는데 딸들이 캐스팅되면서 작품의 규모가 커졌다”고 돌아봤다.
공효진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고 했다. 이정은은 “효진이가 전화해서 ‘언니, 하기로 했어요?’라고 묻더라. 제가 ‘1년째 기다리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도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며 웃었다.
그는 “처음에는 ‘나 때문에 하지 마. 너희가 정말 좋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좋고 역할이 좋다면 참여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들 정말 적극적이었다”며 “효진이가 엄마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고 하더라. ‘동백꽃 필 무렵’ 때 딸 키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정은이 ‘경주기행’에 끌린 이유 중 하나는 ‘복수’였다. 그는 “저는 복수에 늘 실패한다”며 웃은 뒤 “김미조 감독이 이번에는 끝까지 간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고 작품을 택한 이유를 짚었다.
그러면서 “사적 제재 뿐만 아니라 여정을 떠나면서 감춰져 있던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고, 자식이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남겨진 사람에게는 어떤 시간이 이어지는지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김미조 감독님과 인연도 있지만 그런 점 때문에 선택했다. 그리고 제가 주인공이지 않나”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 딸 공효진, 박소담, 이연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였다. 그는 “캐스팅 이후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다들 적극적이고 토론하는 걸 좋아했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도 비슷했다. 현장에서는 굉장히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배우들이라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첫째 딸 장주 역의 공효진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신이 배우는 게 많았다고 돌아봤다.
이정은은 “효진이는 제가 멘토라기보다 오히려 그쪽이 제 멘토다. 제가 연기를 하겠다고 이 산업에 뛰어든 시점 등을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는 오히려 현장 선배다. 배울 게 많고 듬직하다”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때 함께 연기한 경험이 있으니까 현장 진행도 살펴주고 든든한 오른팔 같았다. 그래서 감정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고마워했다.
둘째 딸 영주 역의 박소담에 대해서는 “연기를 너무 잘한다”며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소담이가 ‘잠깐 나가달라’는 대사를 할 때 제가 얼굴이 빨개져서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 섭섭하기도 하고 ‘뭐 저런 게 다 있어’ 싶기도 했다. 그만큼 이 배우의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이라며 “영주는 눈물이 없을 것 같은데 굉장히 여린 친구다. 계획적인 면모 뒤에 있는 여린 모습을 소담이가 잘 만들어줬다”고 치켜세웠다.
막내 동주 역의 이연에게서는 뜨거운 열정을 봤다.
그는 “연이는 행동파고 적극적이다. 저는 배움과 성장이 있는 현장을 좋아한다. 어떤 선배나 후배를 만나든 장점을 보려고 하는데, 연이는 성장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배우라고 느꼈다”면서 “저는 개봉한다고 하면 ‘좋다’ 정도인데 연이는 ‘와!’ 하면서 정말 좋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리액션과 행동이 너무 좋고 귀엽다”며 웃었다.
극 중 옥실은 막내딸을 잃은 뒤 8년 동안 그 시간을 품고 살아온 인물이다. 이정은에게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을 엄마로서 연기했다”며 “내가 이 역할을 온전히 다했을까 하는 생각을 개봉할 때까지 계속 곱씹었다. 그래서 마음고생도 있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든, 정신적으로 받는 충격을 감당하기 위해서든 어떤 일을 덮어두거나 용서하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옥실은 그걸 계속 품고 가는 사람이다. 내가 그 감정을 잘 따라갔나 계속 생각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피해자 가족의 심리를 다룬 연구 자료와 관련 서적도 찾아봤다. 외적으로는 ‘시간이 멈춘 사람’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정은은 “처음엔 머리가 ‘너무 ’올드보이‘ 같지 않냐’고도 했는데, 자기 머리를 돌볼 수 없는 사람,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쓸 수 없는 사람이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가발이 아니라 실제 제 머리다. 제가 머리숱이 많은데 촬영하다가 성이 날 때마다 머리가 서더라. ‘머리도 감정이 있구나’ 싶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변요한과의 강렬한 연기 호흡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정은은 “격렬한 장면을 찍으면서도 서로 툭툭 털고 마음껏 연기할 수 있다는 게 특별했다”며 “다른 작품에서 같이 작업했을 때와 비교하면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 싶더라”며 변요한의 연기에 감탄했다.
박소담과는 작품 밖에서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갑상생암 투병으로 공백기를 가진 박소담은 앞서 이정은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정작 이정은은 “내가 새벽에 찾아갔던 건 기억이 안 난다”며 웃었다.
그는 “소담이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기생충’ 때 아카데미 레이스를 같이 다녔고, 이후 아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침 제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끝내고 제주에 부모님을 위해 마련해둔 집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비어 있었다. 그래서 소담이에게 ‘가서 청소하고 있어’라고 했다. 제주 투어 코스도 소개해줬다”며 “저는 같이 있지도 못했는데 그 시간을 소담이가 오래 기억해준 것 같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런 선행을 했나’ 싶었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박소담이 배우로서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선배의 애정이 묻어났다.
그는 “‘기생충’ 같은 작품을 거치면서 30대 초반 여배우에게 배우라는 일이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속도에 잠식될 수도 있다. 아프고 난 뒤에는 소담이의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진 느낌이 있다”며 “작품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런 시기를 잘 넘긴 것 같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라며 응원을 보냈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정은은 “저는 츤데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옥실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잔정은 있다는 것”이라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경주기행’을 통해 맺은 네 배우의 인연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공효진, 박소담, 이연은 이정은이 영화 ‘좀비딸’을 촬영하던 현장까지 찾아왔다.
이정은은 “‘경주기행’ 작업이 끝난 뒤에도 저는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다들 어디 놀러 갈까 하길래 ‘나한테 와. 회 먹자’고 했다. 영화 ‘좀비딸’을 사천에서 찍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차를 빌려서 왔다. 너무 귀엽더라”며 “공효진이 조정석과도 친하니까 다 같이 정말 즐거웠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며 촬영 이후에도 이어진 우정을 전했다.
지난해 영화 ‘좀비딸’이 관객의 큰 사랑을 받은 데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컸다.
그는 “정말 많은 관객이 극장에 와주셔서 감사하다. 영화를 만들어놓고도 이 작품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알 수 없다”며 “마케팅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고르는 건 대중의 마음”이라며 “관객분들이 ‘좀비딸’의 공생 이야기를 환영해주셨고, 그 마음을 알아봐주신 것에 만든 사람으로서 감사하다”고 했다.
‘경주기행’ 역시 특정 관객층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봤다. 이정은은 “겉으로 보면 여성 서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족 안에는 가장도 있고 형제자매도 있지 않나. 남성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지점이 있다”며 “여러 관객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배우 이정은을 다시 현장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은 거창하지 않았다.
열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집에 있으면 심심하다. 한 달 쉬면 정말 심심하더라. 현장에 가면 지칠 때도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편하게 쉴 날이 오지 않겠나”라며 “지금 아니면 어차피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저는 현장에 있는 게 좋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요즘 연기도 현장도 ‘한 땀 한 땀 뜨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언제 다 뜨지?’ 싶을 때도 있지만 내일 또 뜨러 가는 거다. 큰 바늘을 한 땀씩 같이 밀어붙이는 동료들을 보고 있으면 기운을 얻는다”며 연기 열정을 보였다.
[양소영 스타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