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를 딱 폈는데 비상금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오래 묵혀둔 담금주를 꺼낸 느낌이기도 하고요.”
2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는 영화 ‘비광’(감독 이지원)의 주역 류승룡이 취재진과 만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는 9월 2일 개봉하는 ‘비광’은 한국 야구의 간판스타 중구(류승룡 분)와 배우 남미(하지원 분)가 화려한 톱스타 부부의 삶을 살던 중 갑자기 나타난 중구의 딸 동주(김시아 분)로 인해 파경을 맞은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각자의 삶을 살게 된 8년 후 동주가 여중생 사망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한번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는 가정의 이야기를 담는다.
류승룡은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보석을 발견한 느낌도 있고, 삼성이나 하이닉스 주식을 과거에 사서 묻어놓은 걸 다시 본 느낌도 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류승룡이 ‘비광’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5년 전 러프하게 완성된 편집본이었다. 완성된 영화는 시사회를 통해 확인했다. 그는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면서 “시간이 지났는데도 스태프들과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 열정이나 온도가 식지 않고 유지됐다. 저 역시도 영화를 보면서 촬영 당시의 기억이 팝콘 터지듯 계속 떠오르더라. 정말 진실되게, 후회 없이 했다”고 덧붙였다.
촬영부터 공개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류승룡은 오히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비광’의 힘을 자신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 적용될 수 있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밀도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한참이 지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작품 공개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열망하고 제작진, 배우들과 소통하고 연락하고, 더 돈독해졌어요.”
‘비광’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가진 류승룡이었지만, 처음부터 이 작품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 제안을 받고는 거절했다. 당시 이미 여러 종류의 ‘부성애’를 보여줬던 만큼 피했단다. 류승룡은 “‘무빙’ 이전에는 우는 역할을 당분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극대화되면 표현 방식이 비슷해지더라. 당분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비광’ 역시 ‘아버지’와 ‘부성애’라는 설명을 듣자 시나리오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고사했다. 그러나 이지원 감독이 보낸 장문의 편지가 그의 마음을 돌렸다.
“감독님이 다섯 장 정도 되는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걸 읽고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싶더라고요. 스포가 될 수 있는 인물의 서사와 전사, 감독님이 왜 이 영화를 하고 싶은지,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한 편의 작품처럼 담겨 있었어요.”
편지에는 감독의 진심이 눈물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나중에 보니까 스포이드로 떨어뜨린 것처럼 여기 저기 너무 적절하게 있더라고요. 하하.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셨나’ 싶었어요. 그런데 편지를 읽고 나서 다시 시나리오를 정독하니까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더라고요.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죠. 감독님이 편지로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류승룡은 그동안 영화 ‘7번방의 선물’, ‘염력’, ‘무빙’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부성애를 보여줬다. 그러나 ‘비광’ 속 중구는 그간 보여줬던 류승룡표 아버지들과 출발선부터 달랐다.
그는 “보통 부성애는 아이를 기다리고, 10개월 동안 아내가 품고, 태어나길 준비하고, ‘아빠’라고 부르는 걸 보고, 기어다니고 걷는 걸 지켜보는 시간 속에서 쌓이지 않나. 그런데 중구에게는 그 과정이 다 거세돼 있다”고 말했다.
중구와 동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이라는 존재가 느닷없이 크고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 같았다. 처음에는 내 아이이기 때문에 부성애가 생기는 관계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이 생겼다. ‘기댈데가 없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온 아이’ 그 아이의 뒷 모습을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대하지 않고 원하지 않았던 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감과 책임감이 생기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굉장히 서툴고 거칠고 부족한 아빠”라고 덧붙였다.
실제 류승룡 역시 두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그는 “믿기지 않겠지만 고3 아들이 있다. 시아와 동갑”이라며 웃었다.
이어 “아이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집에 있으면 안아주기도 한다. 큰아들은 군대에 갔는데 그 아이와도 여행을 많이 다녔다”며 “아들들이 살가워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도 잘 해준다. 그런 이야길 하면,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라. 장난도 많이 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는 말에는 힘을 느끼는 것 같더라. 부드러운 엄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어주는 것에서 오는 (책임감 같은) 그런 게 있더라. 관계가 다행히 형성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극 중 딸 동주를 연기한 김시아와도 공을 들여서 관계를 쌓아왔다. 그는 “시아가 극 I 성향이다. 친해지려고 정말 노력했다”며 “영화 촬영 전 제주도 여행에 갔을 때 감독님이 시아를 데리고 와서 같이 카약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이제는 저만 보면 웃는 사이가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시아 뿐 아니라 그간 딸 역할로 만난 배우들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류승룡은 ‘7번방에 선물’로 만났던 갈소원을 언급하며 “제가 아들만 둘이라 딸 역할 배우들을 보면 너무 예쁘다. 앞니 빠진 채 시상식에 왔던 아이들이 커 있는 걸 보면 진짜 아빠 같은 마음이 든다”고 웃었다.
상대역인 하지원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가 매체 활동을 하기 전부터 하지원을 봐왔다”며 “매체에서는 저보다 선배이고 정말 프로다. 한 번도 불평하거나 투덜대거나 인상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기 쉽지 않지 않나. 그런데 그림도 그리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레몬수도 10년째 마신다고 하더라. 뭘 하나 하면 정말 꾸준히 한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작품이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뒤 하지원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로 갈렸지만, 류승룡에게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모습으로 보였다.
“연기도 정말 좋았어요. 헝클어진 머리, 촌스러운 화장과 옷까지. 배우들은 본능적으로 예쁘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저는 처음엔 ‘많이 품었다’고 표현했는데 지원이는 ‘다 내려놨다’고 하더라고요. 그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지원이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제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어떤 작품을 할지 더 기대됩니다.”
류승룡은 작품의 엔딩을 언급하며 “말간 봄볕에 이불을 말리는 느낌”이라고 말해 기대감을 높였다. 그는 “제습기 신 같은 장면이다. 마지막에는 얼굴도 뽀송하고, 베시시 웃는다. 인생에 있던 축축한 것들을 봄볕에 말리는 것 같은 느낌,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 미소에서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더라”며 궁금증을 더했다.
‘비광’에는 사이다 반전이나 통쾌한 결말은 없다. 명확한 해답도 없다. 그러나 류승룡은 그런 지점에서 더욱 크게 ‘현실’을 느꼈다. 그는 “중구가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까지 꿇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이후 남미가 또 자신의 방식으로 중구의 복수를 해준다”며 “통쾌하고 시원하게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최선이라는 점이 와닿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점이 측은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 같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류승룡이 본 ‘비광’의 중심 축에는 가족이 있었다. 그는 “가족들이 각자 있을 때와 다 같이 모일 때 느낌이 다르다”며 “같이 모일 때 관객들에게 기대, 안도의 한숨같이 비로소 숨을 쉴 여지를 주는 것 같다. 가족들이 주는 평범한 힘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모두에게 다 가족사가 있어요. 아주 단란하고 행복한 집도 있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위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 아래 있는 진실을 모르기도 하고, 오해가 쌓여 원망이 되기도 해요.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비광’ 속 중구도 그렇지만, 최근 류승룡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유독 평범한 가장이나 중년 남성을 자주 그린다. ‘한국 중년 남성의 페르소나가 된 것 같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그는 “그런 인물들에게 손이 가고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은 ‘아빠, 이제 센 악역 한번 해야지’라고 한다. 저도 해야지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역할은 마음이 조금 힘들다. 연기를 하는 동안도 결국 제 인생이지 않나. 진심을 다해야 하지만 이왕이면 작품을 하는 동안에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는 한 인물의 인생을 연기하는 직업인 만큼, 캐릭터의 감정이나 색채가 일상에서도 묻어난단다. 류승룡은 “예전에 ‘시크릿’ 같은 작품을 할 때 아내가 힘들어했다. 밖에서 일을 집으로 절대 가져가지 않으려고 해도 무언가 묻어나나 보다”라고 돌아봤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이 행복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작품에 마음이 간다고 밝혔다.
“영화를 보면 감독의 인생이 보이잖아요. 배우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결국 작품의 선택인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엉뚱한 것에도 손이 가요. ‘닭강정’이나 ‘아마존 활명수’처럼 과감하게 구현해야 하는 작품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그런 작품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편입니다.”
5년을 돌아 마침내 관객 앞에 선 ‘비광’도 류승룡의 마음이 담긴 선택 중 하나였다. 예상보다 오랜 기간이 지나 관객들 앞에 서게된 작품이지만, 그는 여전히 당시의 열정을 품고 있었다.
류승룡이 책갈피 가운데 숨겨뒀던 비상금 같은 ‘비광’은 오는 9월 2일 개봉한다.
[김소연 스타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