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렇게까지 하는 악역이 있다고?’ 싶었죠.”
배우 오현경(56)은 최근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 만나 MBC 일일드라마 ‘첫 번째 남자’(극본 서현주 안진영, 연출 강태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2일 종영한 ‘첫 번째 남자’는 복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된 여자와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은 여자의 목숨을 건 치명적 대결을 그린 드라마다.
오현경은 극 중 배우 출신 드림그룹 며느리 채화영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이끌었다. 드림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타인의 아이를 빼앗아 자신의 딸처럼 키우고, 욕망을 위해 가족까지 희생시키는 역대급 빌런으로 시청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오현경은 “처음부터 140부작 전체 대본을 받은 게 아니다보니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제 마음대로 해석해서 가져갈 수도 없었다”며 “감독님, 작가님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나름대로 균형을 맞춰갔다. 배우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돌아봤다.
특히 극 중 교수와의 감정선은 마지막까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미묘한 관계를 그려나가는 게 쉽지 않았단다.
“감독님께도 정말 많이 물어봤어요. ‘교수를 이용하는 거냐, 정말 좋아하는 거냐’고요. 처음에는 ‘채화영이 여기까지 가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기댔을 수 있고, 채화영도 외로움이 있으니 조금은 좋아했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사랑과 이용 사이의 경계선을 어떻게 표현할지 가장 많이 고민했습니다.”
조력자이자 아들 강준호(박건일 분)의 친부 이강혁(이재황 분)과의 관계 설정도 회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변경된 부분이 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의 인연이나 아이에 대한 설정도 처음에는 훨씬 직접적으로 쓰여 있었다”며 “촬영하면서 수정이 많이 됐고, 결국은 지금처럼 여지를 남기는 방향으로 정리됐다”고 설명했다.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 속에서 가장 큰 공을 들인 부분은 채화영이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행을 거듭하는 빌런이지만 시청자들이 욕을 하면서도 끝까지 볼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채화영이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만 보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시청자들이 ‘진짜 왜 저러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오현경표 악역’이 있다고 해주더라고요. 악역을 해도 그렇게 밉지 않대요. 막 나갈때는 그렇게 보여주고, 당할때는 또 당해주면서 조절을 했죠.”
악역의 강렬함만큼 쉽지 않았던 건 일일극 특유의 방대한 대사량이었다. 특히 채화영의 악행들이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만큼 그에게 장면이 집중됐다.
오현경은 “일일극은 감정 연기도 중요하지만 대사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주 시청 타깃이 주부들이다 보니 집안일을 하면서도 귀로 들으며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한 회에 80~90신 정도가 있다고 하면 제가 50~60신에 출연할 때도 있었다. 대본 절반 이상이 제 대사인 적도 있었다. 감정을 만드는 것보다 대사를 외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기도 했다”며 웃었다.
분량이 많은 만큼 후배들을 향한 미안함도 커졌다고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제 분량이 많아서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젊은 배우들이 중심이 돼 더 많이 보여져야 하는 작품인데 제 이야기가 너무 앞에 나오는 것 같아 늘 미안했다”며 “일일극은 결국 젊은 배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르인데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제 역할이 더 커지는 상황이 생겼다. 배우로서는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면서 “물론 배우로서는 감사한 기회였다. 제 나이에 이렇게 큰 역할을 맡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감사했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배우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끝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대사량을 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남달랐다. 오현경은 “매니저와 밤새 대사를 맞추고, 현장에서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촬영했다. 밥을 먹으면 졸릴까 봐 제대로 못 먹은 적도 많았다”며 “대사를 외우다 보니 ‘고시 공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평은 없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것 아니냐. 힘들어서 못한다고 이해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되니까. 진짜 열심히 했다”며 “아쉬움이 있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제가 더 완성도 높은 디테일한 연기를 할 수 있었을텐데. 그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긴장감 속에서 140회차를 모두 소화한 오현경은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에도 중압감에서 쉽게 해방되지 못했다.
“꿈에서도 계속 대사를 외웠어요. 촬영이 종료된 뒤 열흘 넘게 같은 꿈을 꿨죠. 자는 게 무서울 정도였어요. 배우에게 대사를 못 외우는 건 가장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압박감이 정말 컸습니다.”
그에게 힘이 된 것은 바로 동료 배우들이었다. 오현경은 “빌런을 연기하다 보니 병이 날 것 같더라.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을 계속 이해하며 연기해야 했으니까. 그때 이효정 선생님부터, 정찬, 이재황 선배님까지 모두 저를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정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배우는 결국 맡은 역할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작품을 통해 노력을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봐 준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시청자들의 사랑도 감사했지만 무엇보다 함께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제 노력을 알아봐 준 것이 가장 큰 힘이 됐다”고 감사를 전했다.([인터뷰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