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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지루하고, 지루한 게 또 좋다…‘낮과 밤은 서로에게’ [한현정의 직구리뷰]

한현정
입력 : 
2026-11-02 18:53:04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
‘낮과 밤은 서로에게’ 스틸

좋은데 지루하고, 그게 아쉽다가도 좋다. 분위기는 소박하고도 묘하다. 말은 참 많고.

김종관 감독의 신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오래된 시네마의 한 장면 같다. 느리고 수다스럽고, 때로는 낭만적이다. 사건보다 사람을, 극적인 변화보다 관계의 미묘한 온도차를 들여다본다. 배우들은 긴 대사를 제 몫의 리듬으로 살려내지만, 말이 말을 낳는 동안 호흡은 자주 처진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하나의 카페를 스쳐 가는 네 쌍의 남녀를 담은 옴니버스 영화다. ‘더 테이블’에서 하나의 공간에 여러 관계를 불러 모았던 김 감독이 다시 카페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을 마주 앉혔다.

같은 카페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유진(김민하)과 현오(주종혁)가 우연히 마주치고, 중학교 동창 상미(한선화)와 영민(장률)은 느닷없이 재회한다. 웹소설 작가 혜진(심은경)은 영화감독 동남(이희준)과 처음 만나 불꽃 튀는 대화를 주고받고, 아이돌 준비생 나경(전소영)과 연인 종수(김동휘)는 이별의 기운이 감도는 시간을 보낸다.

큰 사건은 없다. 대신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사랑과 이별, 관계와 외로움, 삶과 죽음.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제법 철학적인 말들이 카페의 낮과 밤을 빼곡하게 채운다. 살아 있는 사람인데 어딘가 죽은 것 같고, 죽은 것 같은데 또 살아 있다. 서로 다른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도 슬며시 포개진다.

영화가 품은 정서와 분위기는 분명 매력적이다. 조용히 머물고 싶은 공간이 있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 느닷없이 파격적이면서도 담백한 신파가 있고,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뜻밖에 마음을 건드리기도 한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 포스터
‘낮과 밤은 서로에게’ 포스터

문제는 그 좋은 순간에 도착하기까지 꽤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감정과 관계를 행동이나 사건보다 대화로 풀어내는 방식이 거듭되면서 영화는 점점 정적으로 흐른다. 재치도 있고 삶을 바라보는 감독 특유의 시선도 있지만, 모든 대화가 흥미로운 건 아니다. 늘어지는 리듬까지 쉼 없이 이어지니 피로감도 만만치 않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다기보다 말의 밀도가 높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도 적지 않다. 그 빈틈을 메우는 건 배우들이다. 김종관 감독을 향한 팬심과 신뢰로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긴 대사를 소화하며 네 에피소드에 서로 다른 온도를 입힌다.

그중에서도 심은경과 이희준이 만났을 땐 영화가 확 살아난다.

웹소설 작가 혜진과 영화감독 동남은 첫 만남부터 묘하게 삐걱거린다. 서로를 탐색하고 경계하며 쉴 새 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구강 차력쇼다. 심은경의 예측하기 힘든 호흡과 이희준의 능청스러운 받아치기가 맞물리면서 긴 대사조차 놀이처럼 느껴진다.

한선화와 장률의 에피소드는 독특한 만큼 호불호도 예상된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라는 익숙한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한선화가 만들어낸 상미의 엉뚱한 에너지가 이야기를 예상 밖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 김종관 감독은 현장에서 한선화를 두고 “연기적 파괴력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 파괴력이 누군가에겐 매력으로, 누군가에겐 ‘투머치’로 다가올 법하다.

반면 유진과 현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김민하와 주종혁의 호흡은 자연스럽고 안정적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강하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꿈’이라는 흥미로운 연결고리에도 긴장감이나 캐릭터의 매력이 충분히 폭발하지 못해 네 이야기 가운데 가장 무색무취하게 남는다.

전소영과 김동휘가 그리는 오래된 연인의 시간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다. 앞선 이야기들이 새로운 만남과 호기심을 품었다면 이들에게선 이미 지나가고 있는 사랑의 기운이 느껴진다. 같은 카페를 무대로 사랑의 시작과 설렘, 권태와 이별이 그렇게 차례로 스쳐 간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요즘의 상업영화 문법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속도감 있는 사건도, 강렬한 갈등도, 관객을 다음 장면으로 잡아끄는 극적 장치도 거의 없다. 오히려 오래전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아날로그 감성이 짙다. 사람들이 카페에 오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카메라는 그 얼굴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래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옷은 꽤 잘 맞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관객과 만났을 때는 이 느림과 수다가 하나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일반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보다 넓은 관객을 설득하기엔 서사의 동력이 약하고 대화 중심의 전개 역시 호불호가 클 수밖에 없다. 이 긴 수다를 즐길 수 있을지는 결국 취향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싫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분위기가 있고, 배우가 있고, 사람을 바라보는 김종관 감독의 시선에는 온기가 있다. 몇몇 장면과 대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가만히 남는다. 다만 그 순간들을 만나기까지 조금 오래 기다려야 한다. 희한하게도 어떤 순간엔 그 지루함마저 편안하다.

어쩌면 이 모순이 ‘낮과 밤은 서로에게’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오는 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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