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방송·예술 활동에서 배제됐던 문화예술인들에게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처음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27-2부(재판장 서승렬)는 17일 배우 문성근, 방송인 김미화, 영화감독 박찬욱 등 문화예술인 36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와 이 전 대통령, 원 전 원장은 공동으로 원고 1인당 500만 원과 이에 대한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1심은 국가의 배상 책임은 소멸시효(5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뒤집고 국가의 공동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불법행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진 경우, 손해도 날마다 새로운 불법행위에 기초해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 사건 블랙리스트 역시 지속적 불법행위에 해당하며,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번 소송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7년 9월, 국정원이 MB정부 시절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운영하며 비판적 성향의 연예인, 문화예술인에 대해 방송 출연 배제, 영화 지원 차단, 세무조사 압박 등을 가한 사실이 드러나며 시작됐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TF는 2009년부터 당시 기조실장 주도로 구성돼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해 조직적인 퇴출 압박을 가했다.
TF 명단에는 배우 문성근·명계남·김민선·김여진, 감독 박찬욱·봉준호·이창동, 방송인 김미화·김제동, 가수 윤도현·신해철·김장훈 등 총 82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문성근 등 36명은 2017년 11월 “정부의 조직적 배제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와 책임자들을 상대로 1인당 500만원, 총 1억8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처음 단독 재판부에 배당됐다가 쟁점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합의부로 이송됐고 소장 접수 2년 만인 2019년 11월 첫 변론이 열렸다.
2023년 1심 재판부는 “공무원들이 문화예술인의 신상정보를 기재한 블랙리스트를 조직적으로 관리한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라며 “공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해 생존권을 위협하고, 법치주의와 국가의 문화지원 공정성을 훼손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당시 피해자들은 추가 제재 가능성에 대한 심리적 압박 속에서 장기간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은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해 국가의 직접적인 책임이 처음 인정된 사례로, 향후 유사한 정치적 배제 사건들에 대한 법적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