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고정관념 가장 부담…늙은 변태 최악”
“늘 잠재적 고용 불안 상태…2억 예산 ‘얼굴’ 연상호 대단”

“분량이 크지 않았는데 예진 씨가 고맙게도 하겠다고 했어요. 어떻게 보면 표현하기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인물이거든요. 예진 씨가 영화를 본 친구들이 ‘너 이걸 왜 했어?’란 말만 안 듣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두고 두고 생각나고 가장 무서웠어요. 그래서 공을 가장 많이 들였죠.”
‘한국의 거장’ 박찬욱 감독(62)이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관객들과 만난다.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이다.
개봉을 하루 앞둔 23일, 박찬욱 감독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개봉 소감을 물으니, “상처 받을까봐 영화에 대한 반응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고 있다. 주변에서만 간간히 들려준다”며 운을 뗐다.
박 감독은 “2006년 원작 소설이 재출판 됐을 때 축사를 쓰면서 마음에 계속 품고 있었던 이야기”라며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변주가 많았고, 제목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렴하고, 또 고뇌하면서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됐다”고 개봉 소감을 밝혔다.
“멘탈이 약한 편이라 관리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흥행도 언제나 바랐고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힘들게 만든 작품이니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보면 좋겠다는 욕심에서죠. 극단적으로 말해서 공짜 관객이어도 좋으니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이자 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박 감독은 “데뷔 감독이 아니고서야 늘 부담감이 된다. 전 작품과 비교를 스스로 하기도 한다. 신작 개봉을 앞두고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 겁도 난다”며 “‘헤어질 결심’이 시적인 느낌이라면 ‘어쩔수가없다’는 산문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이 여백이 많았다면 이 작품은 꽉 찬 영화다. 아이러니 한 남성적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거장의 이름값’에 대한 부담감도 토로했다. 박찬욱 감독은 “내 영화가 ‘굉장히 훌륭하겠다’라는 기대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다. 다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이렇지’라는 고정관념이 굉장히 부담스럽다. 언제나 떨쳐버리고 싶은 문제”라고 했다.
“‘도끼’나 ‘모가지’라는 제목을 쓰고 싶었지만 못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에요. 선입견 없이 신인감독의 영화처럼 와서 백지 상태에서 작품을 봐주면 어떨까 싶었지만, 저에 대한 고정관념은 잔인하고 노출, 성적인 묘사가 있다는 게 있어서. 뒤틀렸고 특히나 ‘변태적’이라는 선입견도 부담되고요. 나이가 들수록 늙은 변태처럼 보일까봐 걱정이 되네요.”
고뇌 끝에 정한 제목이 지금의 ‘어쩔수가없다’다. “감탄사처럼, 버릇처럼, 특별한 생각·고뇌 없이 남발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의 큰 테마인 ‘실직’ 관련해서는 “영화 일을 하는 우리들도 잠재적인 실직 상태에 놓인다. 한 작품 끝나면 뭐 하나, 혹은 지금은 버티고 있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겨서 작품이 안 들어오고, 투자도 안 되는 일이 닥치면 어떡하나 싶다. 남 이야기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직은 한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시대 남자들의 경우에는 남성성에 대한 부정으로도 느낄 수 있다. 사내 구실을 못 하는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여러모로 무서운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남주 이병헌과는 이미 호흡을 맞췄지만, 여주 손예진과는 처음이다. 박 감독은 “병헌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미리’ 역을 예진 씨에게 제안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만수는 물리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맞딱뜨리게 되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고, 가슴까지 오는 장화 같은 것도 입고 변화가 많은 인물인데, 미리는 거의 집에만 있고 행동이라고 해봐야 약간의 삽질 정도를 한다”며 “(손예진의 캐릭터는) 대부분 가만히 본다, 몇 마디 한다, 통화를 좀 하고, 포옹하고 약간의 대화를 하고 별것 없다, 말하고 보는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을 맡은 셈이라고 했다. 박 감독은 “미묘한 표정의 변화, 어조 억양의 변화 이런 것으로 큰 딜레마 상황을 표현해야 했다. 그걸 정말 멋지게 해내더라”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예진 씨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게 ‘영화를 본 친구들이 ‘너 이걸 왜 했어?’란 말만 안 듣게 해주세요‘라고 하더라. 그 한 마디가 두고 두고 마음에 남고, 무서웠다. 그래서 공을 가장 많이 들였다”고 강조해 웃음을 안겼다.

‘15세 관람가’ 등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딱히 목표에 둔 것은 아니었다”는 박 감독은 “예전에 강도가 높았던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가다가는 청소년관람불가가 나오겠는데 어쩌지?’ 단계에 도달했을 때 굳이 피해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헤어질 결심’이나 ‘어쩔수가없다’는 각본은 쓰다 보니 위험할 게 별로 없었다. ‘이렇게 만들면 팬들이 실망하겠는데?’ 이러면서 더 넣거나 더 자극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업계가 어려운 만큼 예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박찬욱 감독은 “저예산 제작비가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한 기획이 따로 있을 것 같다. 최근 연상호 감독이 ‘얼굴’을 2억원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만약 ‘부산행’이라면 그렇게 찍겠다고 못 하지 않나? 나도 ‘얼굴’과 같은 스토리나 기획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작업을 위해서는 스태프, 배우들에게 사정을 해야 한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닌데 연 감독이 정말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더불어 “본의 아니게 이런 시기에 개봉하는 것 같아서 한국의 극장을 살리는 책임을 막 어깨에 짊어진 것 같은 막중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건 처음”이라며 “적어도 관객들이 ‘한국영화 재미있네’ ‘다음엔 뭐 나오는지 기다렸다가 한번 더 봐야지’ 하는 만족감으로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오늘(24일)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