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고통받는 분들이 계신데, 현실에 없던 사이다 응징을 할 수는 없었어요.”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극본 이지현, 연출 박준우)가 종영 후에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제작진은 채널과 제작사로부터 ‘사이다 전개’ 요구를 받았지만 현실을 외면한 권선징악 대신 피해자들의 상처와 시대의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길을 택했다.
박준우 감독과 이지현 작가는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한 종영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시작부터 결말에 숨겨진 비화, 제목의 의미, 그리고 작품이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털어놨다.
지난달 26일 종영한 ‘허수아비’는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혐오하던 놈과 뜻밖의 공조 관계를 맺으면서 펼쳐지는 범죄 수사 스릴러를 담은 작품이다.
첫 방송 시청률 2.9%(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로 시작한 ‘허수아비’는 8.1%라는 자체 최고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는 지난 2022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기록한 17.5%의 뒤를 잇는 ENA 역대 2위 기록이다.
이지현 작가는 “관심으로 지켜봐 주셔서 감사하다. 잘 마무리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박준우 감독 역시 “잘 될 줄 몰랐다. 준비, 기획이 5년 전이다. 그 이후 편성 받으려고 시도했는데 내용이 내용인 만큼 너무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라 고사를 많이 당했다. 작가님과 제가 어떻게 하면 편성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스릴러 장르를 많이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허수아비’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벌어진 이춘재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채널에서 편성을 고사할 정도로 어려운 주제였는데도 왜 이런 주제를 선택했을까. 박 감독은 전작 ‘모범택시’를 위해 취재를 하던 중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작품을 만들 결심을 하게 됐다.
“윤석여 선생님이나 김용복 선생님 등 피해자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때 김현정 양 사건을 알게 됐고요. ‘이런 이야기도 드라마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이야길 듣고, 처음엔 저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범죄 사건을 통해 그 시대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이 계속 거절해서 1년을 설득했어요.”
이 작가는 “‘모범택시’가 끝난 뒤 제안을 주셨는데,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며 박 감독의 제안을 고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실화를 다루는 게 부담스러워 거절했는데 감독님은 ‘거절당했다’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계속 제안하더라. ‘허수아비’가 잘 끝나고 보니 그때 절 포기하지 않고 작가로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범죄를 다룬 작품들은 ‘권선징악’을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는 철저히 응징받고 피해자는 일상을 회복한다는 ‘사이다’ 응징을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수아비’ 제작진은 이를 배제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
박 감독은 “제작사나 채널에서도 사이다 전개를 원했다. 하지만 현실에는 그런 응징이 없었지 않나. 피해를 본 분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전히 사건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 현실에서 처벌받지 않은 일을 드라마에서만 시원하게 응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드라마는 윤석여, 김용복 선생님 때문에 시작된 작품이다. 처음부터 판타지적 해피엔딩은 생각하지 않았고, 배우들도 그 방향을 지지해줬다”고 말했다.
작품의 제목 ‘허수아비’에도 여러 의미가 담겼다. 이 작가는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허수아비인 척 살인을 하는 인물이 중심이었고, 범인이 밝혀진 이후엔 다른 허수아비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공권력도 허수아비일 수 있고, 끝까지 노력했지만 범인을 잡지도, 피해자를 구하지도 못한 태주(박해수 분) 역시 허수아비일 수 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잘못된 수사에 동참했던 인물들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또 “태주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누구에게나 옳은 선택을 하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끝까지 외면한다면 결국 허수아비로 남게 된다. 그 시대에도 허수아비로 남지 않고 인간으로서 해야 할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덧붙였다.
박준우 감독 역시 태주를 ‘허수아비’의 핵심 인물로 꼽았다. 그는 “그 당시 수사진 중 태주처럼 후회한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다면, 김현정 양 사건 역시 알려지기 어려웠을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범의 진술 때문에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다는 점이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돌아봤다.
‘허수아비’ 속 범인은 비교적 일찍 공개됐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범인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박 감독은 “빨리 밝혀야 우리가 원래 하고자 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에 7부가 공개 시점으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다”면서 “그 전까지 범인을 향한 궁금증이 시청자들을 끌고 갔다면, 이후에는 이 작품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넘어가야 했다”고 짚었다.
엔딩을 두고도 제작진은 여러 고민을 했다. 박 감독은 “태주를 죽이는 결말도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고 죄책감을 안고 있어 비극적 결말도 가능하다고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이에 반대했다며 “태주는 마지막까지 사건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죽여버리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더 화를 냈을 것 같다. 태주는 사회적 지위와 직업을 모두 잃지만 결국 사람들을 얻는다. 최소한의 심리적 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태주와 지원(곽선영 분)의 관계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로맨스가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에 대해 선을 그었다. 박 감독은 “현장에서 두 배우에게 서로 좋아했던 사람처럼 감정을 얹어보자고 한 적은 있지만 로맨스를 전제로 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 작가 역시 “‘함께였겠지’라는 대사는 로맨스라기보다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추모의 의미에 가깝다”며 “열린 결말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이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박 감독은 강태주 역의 박해수와 진범 이기환 역의 정문성, 차시영 역의 이희준 등을 언급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젊은 시절과 노년, 30년을 오가며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고, 박해수는 처음부터 원픽이었어요. 정문성은 대본을 보자마자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고, 이희준도 비교적 늦게 합류했지만, 모두 작품에 대한 애정이 컸어요. 곽선영은 촬영 중 NG를 한 번을 안 낼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특히 정문성이 연기한 이기환 캐릭터는 제작진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 중 하나였다. 박 감독은 “범인을 절대 영웅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괴물 같은 존재로 남겨두고 싶었다”며 “정문성 배우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어 “박해수와 정문성의 대결 장면은 이틀에 걸쳐 촬영했는데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았다. 스태프들도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을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제작진은 작품이 오래 기억되기보다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 작가는 “연쇄살인사건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평범하고 온전했을까를 꼭 담고 싶었다”며 “12부 마지막 장면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이런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며 “작가님께 3부작을 제안했는데 일단은 거절당한 상태”라고 후속에 대해 열린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이춘재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며 “우리가 얼마나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와 실화를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김소연 스타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