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전히 나의 목소리 만으로 감정을 모두 살려야 하니까 그 지점이 정말 어려웠어요. (한편으론) 굉장히 까다로웠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공개 하루 만에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하더니, 현재까지도 그 왕좌를 지키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무려 ‘기생충’(감독 봉준호)을 넘고 북미를 뒤흔들고 금의환향한 토종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도 국내 극장에 등판했다.
이 두 편의 심장엔 ‘얼굴 없는’ 이병헌이 있다. 단순한 성우가 아닌, 감정을 설계하며, ‘목소리’라는 새로운 언어로 세계와 소통 중인 그다.
이병헌 역시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두 편의 애니에 쏠린 관심에 얼떨떨해했다. 이미 ‘오징어 게임’ 시리즈로 글로벌 사랑을 넘치게 받아온 그이지만 이번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생경하지만 반갑고 또 뿌듯한 새 경험이란다.

그는 18일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에 “처음엔 ‘케데헌’의 영어판 녹음만 진행하기로 했다. 내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다 보니 아주 작은 감정 변화라든지 대사의 톤 같은 걸 정확하게 맞추는 게 중요했다”고 운을 똈다.
이어 “크리스 애펄헌즈 감독이 캐릭터들 상황과 감정들을 다 알고 있는 분이어서 그 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작품의 의도라든지 그런 걸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가이드를 많이 받았다”며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고,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다보니 아무리 한국적인 소재라고 해도 결국 영어로 전달되는 뉘앙스가 되게 중요했다. 외국인이 영어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까다로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영어 녹음을 마치고 몇 달 후에 한국어 버전의 목소리 연기도 추가로 제안이 왔는데 그 부분은 훨씬 자신감 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참여했죠.”

‘케데헌’는 악령들로부터 인간 세계를 지키는 인기 걸그룹 헌트릭스가 악령 세계에서 탄생한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와 인기 경쟁을 벌이며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을 담는다. 소니 픽처스와 넷플릭스가 합작한 외피는 미국산이나 서울의 거리와 음식, 정서까지 생생히 담긴 알맹이는 K컬처 콘텐츠다.
그가 연기한 ‘귀마’는 주인공들인 K팝 헌터스들과 대척점에 있는 최악의 악,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를 지닌 동시에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는 개성파 어둠의 마왕이다.
오히려 그 지점이 좋았다는 그는 “어설프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좋았다”면서 “모든 사람은 수천 가지 성격을 지녔다. 그중 극히 일부라도 내 안에 있다면, 그 조각을 확장하는 게 연기”라며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귀마’에도 녹여냈다.
그렇게 그는 밑그림뿐인 화면 속 빈 공간을 상상력과 공감으로 채워냈고, 감정의 진폭을 조율하며 생생한 연기를 펼쳤다. 그는 “한국적인 이야기와 기획이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것이 놀랍다. 함께 참여한 입장에서 보람차고 기분 좋았다”며 다시금 뿌듯해했다.
그리고 이 도전의 숨은, 동시에 강력한 또 하나의 동기는 바로 아들이다. “아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거의 없었다”는 그는, 하지만 ‘케데헌’를 함께 본 아들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고 “프론트맨이나 데몬 말고, 좋은 역할을 맡고 싶어졌다”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그를 ‘킹 오브 킹스’(이하 ‘킹오킹’)으로 이끌었다.
“우리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아빠가 이거 참여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게 좋았다”는 그는 “이 영화를 종교에 기반한 영화라기보단 역사 속의 훌륭한 인물을 소개해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런 점 덕분에 부담 없이, 재밌게 할 수 있었다고. 이병헌은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배경이 서양이다 보니, 아무리 한국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등장인물 모습이나 이야기 자체가 서양적이다. 그런데 그걸 한국어로 연기했을 때, 번역극처럼 들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지점들을 조심해서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반적인 이야기 구성도 마음에 들었는데 ‘킹오킹’ 역시 결국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지 않나. 나에게도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에 내가 아이랑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랑 많이 겹쳐 있어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작품은 종교적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 장치를 통해 믿음, 사랑, 성장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감정의 결을 따라 섬세하게 전달한다. ‘케데헌’과 달리 뼈속까지 토종 K콘텐츠다.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감독이 연출하고, 공동 제작했다.
이병헌은 극중 소설가 찰스 디킨스를 연기한다. 아서 왕을 동경하는 아들 ‘월터’에게 ‘진짜 왕’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이자 진짜 이야기꾼이다. 이번에도 ‘디킨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꾼으로서의 진정성과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함께 담아낸 그였다.

끝으로 그에게 ‘목소리 연기만의 어려움이나 새로웠던 점’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에서는 대사를 포함해 눈빛, 표정, 몸짓, 감독의 연출 이런 것들이 감정을 보완해 주는데, 목소리 연기는 정말 말 그대로 목소리 하나로 감정의 디테일을 다 표현해야 되니까 쉽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이어 “물론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녹음을 진행하니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건 작가가 이미 그려놓고, 완성해 놓은 하나의 작품인 거다. 온전히 나의 목소리로 그 감정을 모두 살려야 하니까 그 지점이 정말 어려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녹음할 때는 실제로 작품 속에서달리는 장면이 있으면 스튜디오에서 제자리 뛰기도 하고, 액션이 있는 장면에서는 막 혼자서 움직였고 표정도 따라 지으면서 했다. 진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듯이 해야 그 감정이 목소리에 오롯이 담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몸도 같이 움직이고 표정도 지어줘야 진짜 감정이 나와서 작품에 입혀지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한국적인 것’을 세계 무대에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한계를 두지 않는 K-콘텐츠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아빠로서의 진심으로 두 작품을 품었다. 귀마와 디킨스. 극과 극의 캐릭터지만 결국 이병헌이라는 한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 파도처럼 스며든 것.
그 물결에 몸을 맡긴 관객은 눈이 아닌 귀로, 그리고 다시 오감으로 그 진심을 깊게 느낀다. 메가 히트작 속엔 그가 언제나 ‘비밀병기’가 될 수밖에 없는, 독보적 ‘월클’의 이유다.